➖ 미술관에 간 연예인

미술관에 간 연예인 || 방탄소년단 BTS RM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 사이의 공간: 한국 근대미술

세상의 모든 예술 아트하트 2022. 9. 1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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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과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전시에 미술애호가로 알려진 방탄소년단의 리더, 알엠의 방문했습니다.
격동의 시기에 꽃 피운 한국 근대미술 전시로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화가 이중섭, 박수근, 나혜석, 김환기, 고희동, 김관호 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예술 아트하트 미술관에 간 연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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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자화상과 BTS 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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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8-49년경

이쾌대는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후 1939년 귀국하여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며 화단의 주도적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1945년 해방 후 극심한 사회 혼란 속에서도 그는 작업에 매진하였고, 이 시기 많은 걸작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군의 포로 신세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1953년 남북 휴전협정 체결시 포로교환이 있었을 때, 이쾌대는 북을 택했습니다.
전쟁 후 남측 정부는 오랫동안 월북 작가에 대한 언급을 금지했습니다. 남측에서 이들 작품을 연구하고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은 198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으며, 이쾌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남쪽에 남아 이쾌대의 작품을 수십 년간 소중히 보관해온 바로 그의 가족들 덕분에 그의 작품이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그의 예술적 성취가 제대로 조명받게 되었습니다.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전문적인 화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꽉 다문 입술과 부릅뜬 눈으로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화가는 뚜렷한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쾌대는 서양식 페도라를 쓰고 있는데, 이 모자는 근대기 한국 엘리트 남성들이 자주 착용하던 것이고, 왼손에는 서양화 제작을 위한 팔레트를 들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서양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공존한다는 점이 특징인데요. 이런 서양화 도구들과 함께, 한국의 수묵화나 서예를 제작할 때 사용되는 모필이 병치되고 있는 점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화가는 한국의 전통 복장인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으며,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 또한 한국의 전통의상을 입은 채 한국적인 요소를 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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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자화상›, 1928년경

나혜석은 1896년에 태어나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양화를 공부한 여성 화가였습니다. 1913년 도쿄 여자 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했고, 귀국 후 1921년 서울에서 첫 양화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당시 서양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선구적이고 이례적인 기록입니다.
나혜석은 또한 여성해방운동에 일찍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신여자'라는 잡지를 만들고, 수많은 여성해방 관련 글을 기고하며, 삽화를 그리고, 소설을 쓰는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신여성'이었습니다.
변호사 출신으로 외교관이 된 남편을 따라 1927년 유럽과 미국을 1년 9개월간 여행한 경험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파리 체류 시기, 로제 비시에르(Roger Bissiere)가 운영하던 스튜디오에서 공부한 이력도 있습니다. 이때 이후 초기의 인상파적인 작품에서부터 변모하여 화가의 내면 상태를 주관적으로 표출하는 대담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자화상'으로 알려진 이 작품 또한 대상의 묘사에 충실하다기보다, 어둡고 우울한 정조를 강조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나혜석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이들은 이혼했습니다.
당시 이혼녀는 사회적 낙인의 대상이었지만 오히려 나혜석은 이혼의 이유를 낱낱이 밝히고, 독립적인 주체로서 여성의 자율권을 끊임없이 주장했습니다. 또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일 뿐'이라는 당시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주장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점차 가족과 사회 전체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하였고,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가 1948년,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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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공간: 한국 근대미술
The Space Between: The Modern in Korean Art
일시 | 2022-09-11 ~ 2023-02-19
장소 | 해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
관람료 | 무료
작가 | 고희동, 김관호,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이응노, 권진규, 임응식 등 한국 작가 88명
작품수 | 회화, 한국화, 조각, 사진 등 130여 점

LA 카운티뮤지엄과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전시로, 한국의 근대 시기를 주제로 서구권 국가에서 열리는 첫 번째 기획전이다. 이번 전시는 1897년부터 1965년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 한국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은 19세기 말 드디어 외국 세력에 문호를 강제 개방하게 된다. 급기야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고, 1945년 2차 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해방을 맞았지만, 극심한 이념갈등, 한국전쟁, 남북 분단의 역사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극과 혼란 속에서도 예술가들은 태어났다. 이들은 일본을 통해, 때로는 프랑스와 미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서양의 새로운 미술 경향을 받아들이고, 이를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융합하고자 노력했다. 고희동, 김관호, 나혜석,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등 한국 근대작가들이 총망라된 이번 전시에는 회화, 한국화, 조각, 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130여 점이 출품된다. 전시는 미국 LA 카운티뮤지엄에서 2022년 9월 11일부터 2023년 2월 19일까지 개최된다.


박수근, 유동 Image : MMCA

박수근, ‹유동›, 1963

박수근은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근대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12살 때 우연히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화집에서 보고 감동을 받아,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밀레의 작품이, 평범한 농부의 일상을 소재로 하면서도, 마치 종교화를 보는 것 같은 성스러움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박수근의 작품 또한 평범한 한국인들의 소박한 일상과 노동, 그리고 놀이를 소재로 했습니다.
박수근의 작품은 화면 전체에 화강암과 같은 두꺼운 물감층으로 뒤덮여 있는데, 이는 당시 한국의 다른 작가에게서는 볼 수 없는 혁신적이고 독보적인 방식입니다. 화강암은 한반도 전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돌인데, 오랜 세월을 견뎌낸 거칠고 단단한 특성으로 인해,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의 미의식을 반영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습니다. 박수근은 북한의 고구려 고분벽화 발굴에 영감을 얻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무덤 안 석조 벽면에 그려진 벽화의 질감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박수근 작품을 통틀어 ‘놀고 있는 아이들’이라는 주제는 자주 등장하는데,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대표작입니다.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의 따뜻한 연대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소담한 초가집 앞에서 아이들은 다함께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는데, 화면 구석의 한 아이만은 등에 아기를 업고 돌보는 일을 하느라, 친구들 무리에 끼지 못한 채 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김환기, 산월 Image : MMCA

김환기, ‹산월›, 1958

김환기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1930년대, 당시 가장 전위적인 미술가들과 교유하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추상미술을 시도한 화가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1940년대 말 이후 그의 화풍은 점차 한국의 전통문화를 작품에 융합해가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한국의 산, 매화, 조선 백자, 특히 달항아리와 같은 소재들이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1956년, 김환기는 파리로 가서 약 3 년간 체류합니다. 이때에도 프랑스의 앵포르멜이나 누보 레알리즘 같은 당시의 새로운 조류에 동조하기보다는, 한국적 특색을 살린 자신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산월›은 김환기가 파리에서 그린 그림으로, 화가가 마음 깊이 사랑했던 소재인 조국의 자연을 그린 것입니다. 이 작품은 구상적이면서 추상적인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산과 달의 이미지는 기하학적 형태와 선으로 단순화되었으나, 또한 알아볼 수 있게 표현되었습니다. 캔버스 위쪽의 두터운 붓질은
산등성이를 상징적으로 암시합니다. 화면 아래 둥근 형태는 보름달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달의 하얀 색감은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푸른 색조는 그의 이후 작품에서도 계속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김환기 ‹산월›

유영국, 작품 Image : MMCA

유영국, ‹작품›, 1957

유영국은 김환기와 함께 1930년대 처음으로 추상화를 실험한 화가입니다. 그는 평생 자신의 확고한 비전을 견지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많은 조선인 화가들이 다녔던 도쿄 미술학교에 가지 않고,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던 문화학원에서 수학하기로 선택한 것도 그런 확신에 기반한 것입니다. 도쿄 문화학원이 추상화를 전공으로 가르친 것은 아니었지만, 유영국은 추상의 매력에 빠르게 매료되어, 처음부터 추상을 시도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미국과 유럽의 미술이 직접적으로 들어오면서 한국에서 추상화 경향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그러나 김환기와 다른 화가들이 추상 이외의 다양한 실험을 하는 동안에도, 유영국은 원색을 기반으로 삼각형과 사각형, 선들로만 이루어진 추상화의 원리를 계속해서 탐구했습니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유영국이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직후에 제작되었습니다. 그는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고기잡이와 양조장 운영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약 10 년간 작품 제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사업을 그만두고 화가가 될 결심으로 상경하여 '모던 아트 협회'라는 예술가 그룹을
결성하던 시기에 바로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산 능선을 따라 노을이 지는 것 같은 자연 풍경을 연상시키면서도 기본적인 직선, 곡선, 색면으로만 구성된, 회화적 질서에 아주 충실한 작품입니다.


변월룡, 1953년9월 판문점 휴전회담장 Image : MMCA

변월룡, ‹1953년 9월 판문점 휴전회담장›, 1954

변월룡은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일리야 레핀 미술아카데미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수학하고, 이곳에서 교수를 지냈습니다. 그는 유화, 에칭, 드로잉으로 제작된 다수의 아름다운 초상화와 풍경화를 남겼으며, 평생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하였습니다. 그가 죽는 날까지 고수했던 한국식 이름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1953년 변월룡은 소련 문화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을 방문해, 15개월 동안 체류하게 됩니다. 그는 북한에서, 전쟁으로 파괴된 평양 미술대학을 러시아 미술아카데미를 모범 삼아 재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론과 실기를 가르쳤습니다. 이때 북한의 예술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의 초상화와 함께 북한의 아름다운 산천 풍경, 소박한 민중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1953년 9월 판문점 휴전회담장›은 그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제작한 작품으로,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절충된 상트페테르부르크 특유의 화풍을 보여줍니다. 제목에서 말하고 있듯, 이 작품은 판문점의 회담장을 그린 작품입니다. 남북한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전쟁 포로 교환이 이루어진 바로 그 장소이지요.
러시아에서 태어나 모국 땅을 처음 밟은 변월룡은 역사적 사건의 증인으로서 이 작품을 남겼습니다. 사람 한 명 없는 적막한 회담장 내부와 달리 창 너머 바깥이 너무 밝아서 역사적 비극이 더욱 두드러지게 느껴집니다.


오지호,남향집 Image : MMCA

오지호, ‹남향집›, 1939

오지호는 한국의 풍경을 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렸던 최초의 화가 중 하나입니다. 그는 ‘빛을 포착하는 예술’로서의 회화가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화가였습니다. 그는 풍부한 빛과 색을 구사하며, 밝은 야외 광선을 받아 반짝이는 풍경을 즐겨 그렸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한국 역사
속에서도 삶의 기쁨을 긍정적으로 강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지호는 1926년부터 1931년까지 도쿄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고, 귀국 후에는 한국 특유의 맑고 경쾌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예술가 단체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청명한 공기가 대상의 표면에 반짝이는 빛을 선사하여, 내적 아름다움을 표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향집›은 작가가 1935년부터 45년까지 북한의 개성에 체류할 때 그의 가족과 집을 배경으로 하여 그린 작품입니다. 막 문지방을 넘어서려는 그의 딸 금희는 작은 그릇을 들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자고 있는 반려견, 삽사리에게 밥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지호는 집을 비추는 빛의 맑고 투명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강한 원색을 사용합니다. 집을 표현한 노란색과 오렌지색의 변주는 대낮의 따뜻한 기운을 선사합니다. 화가의 독창성은 큰 나무의 그림자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림자를 검은색으로 표현하는 대신, 푸른색과 보라색의 풍부한 색채를 활용하여 무수히 많은 짧은 붓질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개인의 평범하고 즐거운 일상의 한 순간을 마주치게 됩니다.


장욱진, 나룻배 Image : MMCA

장욱진, ‹나룻배›, 1951

절대적 순수와 단순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화가 장욱진은 정제된 형태와 구성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을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에서처럼, 장욱진의 작품은 가족, 나무, 집, 동물, 풍경 등이 어우러진 시골의 평온한 모습을 정감 있고 소박하게 그려냅니다. 장욱진은 그가 좋아하는 소재를 거의 반(半)추상적으로 묘사하며, 평평한 화면에 단정한 색면과 비정상적인 스케일로 대상을 배치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국 전쟁 중 장욱진은 연기군 내판리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에서 피란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이후 화가의 고향은 그의 많은 마을 그림의 원형이 됩니다. 1951년 고향에서 제작된 작품 <나룻배>는 장욱진이 거친 전쟁의 현실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이상 세계를 향한 열망을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나룻배는 화가의 고향에서 장이 섰을 때 물건을 사고팔기 위한 사람들을 데려다주는 강을 건너는 배입니다. 나룻배에 탄 사람들은 화면 중앙을 과감하게 차지하고 있으며,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인물과 소는 배 위에서 공평하게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며, 각자가 주인공으로서 위엄 있고 담담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전쟁 상황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평온하고 담백한 장면은 거의 초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실제로는 전쟁 중 화가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미술재료를 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장욱진은 일본 유학시절에 사용했던 목판의 뒷면에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나룻배›뒷면에는 화가가 1939년 일본에서 그렸던 작품, ‹소녀›가 세로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오디오 가이드 : 방탄소년단 RM


자료 : 국립현대미술관, 비티에스 알엠 인스타그램
세상의 모든 예술 아트하트 미술관에 간 연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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